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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특별한 편지들, <스페인 야간비행> 정혜윤Bookmark 2015. 10. 26. 22:01728x90
'빛으로 휩싸인 채 어둠 속을 여행했다'
야간비행을 마치고 현기증이 나는 심정을 표현한 듯 보이는, 난해한 표지 위 띠지에 적혀있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책을 열면, 그녀가 부친 수많은 편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여행지 곳곳에서 현실과 이상을 부유하며 사는 양서류에게 편지를 썼다. 특히, 그런 인간 중의 최고 인간인 'Miss 양서류'를 향해서 말이다. 편지를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스페인과 그리고 필리핀에서의 그녀의 치열한 생각들을 만나게 된다. '스페인 야간비행'이지만 필리핀 보홀의 돌고래와 아바탄 강의 반딧불이도 있다. 단순히 스페인이 아니라, 다른 여행지들을 넘나들고자 하는 서술도 작가의 고민의 녹아있는 구성이다. 작가는 스페인과 필리핀을 모두를 여행한 후, 두 나라를 연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경험들을 살포시 연결해 보았다고 한다. 사진 한 장도 없고, 상투적인 문구 또한 더더욱 없는 여행기. 그런데 생생하다. 작가의 발자취가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 도시를 여행하고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여행기의 서술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뤄져 있다.
나도 그 애들과 조금 떨어져서 왼쪽으로 점~프! 낙하! 오른쪽으로 점~프 낙하! 팔을 쭉 뻗고 뒤로 벌~렁 낙하! 팔을 더 길게 뻗고 위로 점~프 낙하! 수없이 따라했단다.물 속 모래는 아주 부드러웠어. 내가 그동안 숱하게 추락했어도 너무 아프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어. 내 발밑을 부드럽게 받쳐줬던,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황금 그물망이 있었던 거야. (...) 내가 모르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 셀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의 선의의 그물망이 내 밑에서 나를 받치고 있었겠지. 비트켄슈타인의 말이 생각났어.나는 서툰 기수가 말을 탄 것처럼 삶 위에 타고 앉아 있다. 내가 곧바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저 말의 성격이 온순한 덕분이다.(p.26)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저지르는 여행법을 거부한다. 여행지가 단순히 배경지로 전락하고, 그 배경지의 주인공이 되려하지 않는다. 셀카봉을 들고 여기저기서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서 온전하게 '존재하기'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게 들어갔던 알함브라였지만, 사방에서 공격적으로 들어오는 셀카봉에 질겁해 그녀는 명소를 재빠르게 나온다.
그녀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방법으로 여행하기는 카메라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조지 오웰 혹은 로르카 시인의 눈이 되어 여행한다. 이 책은 어찌보면 여행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서술이 다른 책에 비해서 적다. 오히려, 그 곳에서 그녀가 불러낸 다른 작가들의 책을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여행지의 경험은 깊이를 더하고 풍부해진다.
나는 '찾던 것을 찾지 못했다고 불평'하지 않지만 계속 날아가는 사람들에게 내 영혼을 따라 부어. 사랑과 모래를 처덕처덕 묻히고 따라서 날아가. 인형도 천사도 아닌 인간으로 날아가. 한쪽은 약점 때문에 다른 쪽은 열정 때문에 무거워진 날개로 날아가. 한쪽 눈으로는 찾던 것을 찾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흘겨보면서, 다른 쪽 눈으로는 즐거움의 표적을 찾으면서 날아가. 사랑에 의지해서 날아가. 로르카가 서러운 마음으로 연거푸 한 말을 떠올리면서 날아가. (p.132)(작가가 좋아하는 로르카 시인의 이름을 딴 공원에서 느낀 그녀의 생각)그녀의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시 <최후통첩>을 읽었던 리스본의 궁전 광장이다. 장렬하고도 뼈아픈 시 <최후통첩>을 쓴 알바르 드 캄푸스(페르난두 페소아의 다른 이명)가 자주 가던 까페 앞에서 그녀는 그 시를 아주 크게 읽는다. 이 행위가 리스본 여행의 목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시도 읽고, 리스본도 구경하고 그렇게 여행 편지를 읽다가, 문득 나도 그녀에게 답장하고 싶어졌다.From. Miss 양서류 at 서울에서안녕! (하세요..작가님?!) 작가님 책을 읽다가 작년 생각이 참 많이 났어요. 리스본이나 보홀은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스페인은 제 첫 유럽여행지였거든요. 돈키오테와 산초처럼 저에게는 S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래 맞아요, 걔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갔었어요. 그리고 여행으로 우리는 참 특별해졌구요. "발과 눈으로 느끼고 오자"라는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다짐과 달리 제 목에 걸린 캐논카메라의 눈으로 많은 걸 보았던 것 같아요. (뜨악해하지 마세요. 저는 다행히 그 사진들의 주인공은 아니었답니다.) 색다른 시도로서 여행지에서 색연필을 들고서 그림도 몇 개 그려보았는데요. 지금 그 그림을 보니 형편은 없지만, 그림을 그렸던 바르셀로나 거리의 바다 까페의 냄새가 그림을 볼 때마다 스쳐가는 듯해요.작가님 덕분에 도시를 만들었던 혹은 도시를 그려냈던 수 많은 인간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페르난도 궁전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 사라마구가 눈을 뜨고 자신의 애인을 온전히 사랑하는 모습을, 덕분에 저도 보았어요.단순히 지루한 일상을 탈출하고, 참혹한 현실들을 도피 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는 점도 인상깊어요. 고야의 <제 자식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라는 그림에서 우리 시대를 생각했다고 했잖아요. 우리 시대는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싫어한다. 이제 그런건 그만 잊어버리라고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고야의 그림은 지옥, 아니 연옥같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하셨지요?저는 이제 막 바르셀로나에서의 택시 에피스드를 마치고 작가님과의 대화를 마치게 되네요. 작가님 글은 읽을 거리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아서 쉽게 '느낌이 이렇다' 말하지 못할 것 같네요.그렇지만, 작가님 글을 보자니 언젠가는 저도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요. 돌고래를 보러 짐을 싸는 날이 제게도 올까요? 선장의 아름다운 눈을 보게되는 눈이 제게도 생길까요?'Bookmar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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