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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의 미래(The Art of Immersion)> 메모한 문장들
    Bookmark 2016. 5. 1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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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5. 5.


    <콘텐츠의 미래> (프랭크 로즈 지음, 최완규 옮김, 2011)를 읽었다.


    요즘 사람들은 즐겁다. 어디서나 끊임없이 재미있는 동영상들과 책과 음악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콘텐츠 제작자는 이미 경쟁자가 넘치는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치열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콘텐츠들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 펼쳤던 책이다.


    먼저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번역서의 한계가 뚜렷하게 보이는 책이였다. 문장 간의 매끄러운 이음새가 부족해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활자 안에 갇힌 메시지를 읽어내기 위해 몇 번이나 문장을 뒤로 넘기해서 읽었다. (독해력이 우수하지 못한 나로서는 힘들었다ㅠㅠ)


    그럼에도, 몇몇 기억하고 싶은 저자의 조언이 있기에 요약해둔다.



    (맥락없이 나중에 써먹을 만한 문장을 뽑아보았습니다)


    - 미디어 생태계가 바뀌고 있는 중심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있다. 이 공간에서는 메시지를 만든 제작자와 시청자 혹은 수용자의 의사소통이 쌍방향으로 이뤄진다. 이 '쌍방향'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컨텐츠를 즐기고 반응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사용자에게 댓글을 남기거나 특정 컨텐츠에 대한 커뮤니티와 같은 사이트에 참여하도록 부추긴다. 인터넷은 딥미디어(Deep media)라고 부를 만한데, 사람들은 인터넷과 같은 기술을 통해 그 세계에 몰입이 되기 때문이다.

    -> 나는 이 내용을 이렇게 해석해보았다. 인터넷에는 하이퍼링크 기술이 있다. 이용자가 특정 내용에 대해 궁금하면 그와 관련한 정보가 있는 사이트로 클릭 한 번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이다. 만약, 어떤 콘텐츠가 수용자가 빠져들만큼 충분히 매력적이거나, 호기심을 자아내는 정보가 있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어진다. 검색하고 또 검색한다.


    -> 책은 이전과 더한 몰입을 시청자들이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널리즘의 분야에서도 이 공식을 따라야 하는가? 몰입은 극적효과를 원하는가? 더 자극적인 소재들? 아니면 이야기에 어떤 의도적인 구멍을 뚫어놓고 이곳에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유인해야 하는가? (매력과 모호함의 사이)



    - 이 때문에, 인터넷 콘텐츠의 네터리브(실화나 허구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구조적 형식)는 이전의 매체에서 보여지던 것과는 달라야 한다. 이를 외면할 경우, 시청자에게 외면받기 쉽다. 아니, 당장은 유의미한 시청률의 이탈이 보이지 않겠지만 미래 시청자들을 유인할 수 없다.


    - 그렇다면 새로운 내러티브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저자가 분명하게 내리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참여하기를 원한다. 제시되는 스토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그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초반에는 두려움과 적대감에 맞서야 했다.


    - 명령과 통제에 세계에서는 누가 스토리를 풀어나가고 있는지 모두 안다. 바로 작가다. 디지털 미디어는 바로 그 작가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다. 청중이 가상의 세계에 자유롭게 발을 내딛게 되면서 20세기 매스 미디어 체계 전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매스미디어는 19세기 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월등히 더 효율적인 인쇄술의 발달과 배급망의 확대로 출판은 기업에나 어울리는 고비용활동으로 여겼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이런 추세에 박차를 가했다. 그 추세를 되돌려놓은 것이 인터넷이다. 작가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청중에게 스토리를 들려줄 수 있지만 이제 커뮤니케이션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신문과 잡지는 더 이상 단순히 사건을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에 대한 토론장으로 변모한다. 영화와 TV역시 카우치 포테이토의 먹잇감을 뛰어넘어 상상의 촉매제가 된다.


    - 사람들은 그 어느때보다 TV를 많이 보지만 자신의 일정에 맞춰 시청 시간을 조절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동시에 자신들이 만든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사진을 플리커에 게재하며 블로거나 워드프레스에서 생각을 공유하고, 마이스페이스나 페이스북에서 다른 이들과 유대감을 기른다. 미디어의 일방적인 통제는 회생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무참히 망가졌다 할 수 있다.

    -> 작가는 시작하고 청중은 완성한다!




    - 어떠한 메시지라도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날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개 무의식적이지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데 그 감정적 반응은 저마다 경험과 성향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스토리 또한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다. 소비자와 '공동 창조'하는 게 브랜드다.

    작가는 스토리를 시작하고, 청중은 그 스토리를 완성한다. 작가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청중은 이에 반응해 그 상황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든다. 매슈 와이너는 <매드맨>을 제작하고 시청자들은 드라마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해서 자신들이 그 시나리오에 처해 있다고 상상하며 나름대로 해석한다. 조금만 기회가 있어도 최소한 청중의 일부는 베티 드레이퍼나 로저 스틸링으로 트위팅을 한다? 그런데, 시사교양다큐를 트위팅을 하게 될까?


    - 소크라텍스는 책 때문에 사람들이 건방증이 심해질 것이라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책 덕분에 인간이 머릿속에만 담는 것보다 대단히 많은 정보를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2400년 전, 책 때문에 바보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경고가 나왔을 때도 우리는 책을 포기하는 대신 '바보'의 정의를 바꿔버리는 것으로 변화에 대처한 바 있다. 구글에 대해서도 같은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쿠엔틴 타라티노의 <펄프 픽션>(1994)

    비선형 내러티브는 웹이 하이퍼텍스트를 인류에 소개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하지만 타란티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주로 전위적인 사상을 가진 예술가들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강간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산적, 여자, 여자의 살해된 남편의 혼령, 목격자 등이 겁탈과 살인에 대한 서로 상반된 증언을 하며 복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작과 중간 끝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순서대로여만 하는 것은 아니다.


    - "원근감의 착각을 버리고 순간적인 감각 인식으로 전체를 해석하는 방법을 채택해" 사물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게임을 계속하게 된다. 단순히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궁금하게, 왜왜?"


    - 어떻게 사람들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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