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가 인간을 보면?>>
"SY학우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학교 때 다전공으로 커뮤니케이션학을 했었는데, 내가 잘 따르는 한 교수님은 내게 자주 물었다. 대학교에서는 나의 생각을 키워야하는 것이 마땅하건만 실제 수업에서 그것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어떤 주제에 대해 '나의 생각'으로 만드는 것이 어색했다. 이게 맞는 건가? 이게 너무 엇나가거나 근거가 부족한 생각이 아닐까? 라는 회의가 들었고, 나는 그럴싸한 답안을 찾으려 노력했다. 최신 이슈에 대해서 기초적인 신문 기사들을 토대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칼럼들을 읽고 그것들을 내 생각마냥 착각했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교수라는 분들이 최신 이슈에 대한 신문 칼럼 기사를 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느 답변이 최근 칼럼의 논지와 비슷하게 답변하자 교수님은 이렇게 짧게 말했다. "그러더군요." 당연히 내 생각이 아님을 읽으신 것이였다.
현상이나 텍스트를 읽고 홀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 자체가 공부다. 질문하는 능력이 사유의 힘이라는 것을 안지도 꽤 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나의 습관이 되지 못한 것이 속상하고 안타깝다. (빨리 답을 알고 싶은 마음에 남의 답을 흘낏 쳐다보게 된 걸까?) 오늘 완독한 <ET가 인간을 보면?>(이채훈, 더난출판)을 쓴 저자는 그런 습관이 몸에 밴 사람 같다. 자신의 전공분야인 철학을 토대로 전방위적으로 인간과 세계와 우주에 대해 질문한다. 이 질문을 찾아가는 시간 속에 나, 사회 그리고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책은 PD이기도 한 저자가 꾸준하게 책을 읽으며 공부하여 쉽게 풀어낸 결과물이다. 쉽게 읽히는 책을 보며 어디서 보고 듣고서는 그럴 듯한 이야기를 하는 나 자신을 반성했다. 내 머리로 생각하자는 저자의 고집스러운 면을 배우자 다짐했다.
내가 집중적으로 읽은 파트는 "4장의 그래서 혹은 그래도 인간"이다. 인류 문명사를 훑었던 "2장 문명의 고단함"이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 "3장 우주 속 인간"도 재미있었지만, 소통과 관련한 4장이 더 의미있게 다가왔다. 지금 우리가 있는 사회는 소통보다는 불통에 가깝기 때문이다. 불통이 우리의 일상이 되고 우리 이웃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게 당연한 정서로 굳어질까봐 무섭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일까?) 저자는 <<유한 계급론>>을 쓴 베블런을 언급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인 이유'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이 장을 연다. 베블런에 의하면 보수주의는 사회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영예로운 장신적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더 심화되면 우리 관념 속에서 보수적 견해를 고수하는 것은 당연히 존경받을 대상으로 평가된다. 이에 반해 혁신 혹은 혁명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하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나는 베블런이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판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의 부를 부러워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어떤 다른 특성까지 존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훔쳐가서 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이들은 혁신이나 혁명을 구체적으로 꿈꾸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삶을 가능하게 할 노동 외의 생각할 시간이 없으며, 변혁에 실패했을 경우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다. 저속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썩은 상자의 사과는 썩지 않을까?'에서는 무능과 악함이 만연한 조직에서의 희망을 묻는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든 사람의 마음 한복판에 있다"는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의 말처럼, 인간은 무능한 사람과 악한 사람 앞에서도 쉽게 복종할 수 있는 존재다. 책에서는 피터의 원리를 언급하면서 악이 싹틀 수 있는 조건들을 이야기하는데 좀 슬프다. 피터의 원리란, 위계 조직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이 입증되는 지위까지 승진하는 경향을 말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무능한 사람이 앉으면서 조직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간다는 것이다. 무능한 사람들이 이상한 결정들을 내리고 그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은 반항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따른다. 그것이 조직안에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피터의 원리'가 나쁜 방향으로만 흐를 경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희망도 있다. 다행이도 '모든' 부하직원들이 기계처럼 불합리한 결정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의 영웅들의 용기에 기댈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목소리들이 더 나올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 마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1
그렇다면, 헛소리와 편가르고 낙인찍기가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가 나와 다른 우리와 소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힘든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저자는 이후에 소통이 인간의 삶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렇게 힘겨운 소통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나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고 읽어 나갔다. 때로는 잘 풀리지 않는 대화가 소모적이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나와 다른 타인과의 벽을 허물고 잠시나마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나를 넓혀가는 과정인 것이다. 2
저자가 모든 학문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인 걸까. 인문학, 사회학을 너머 자연과학까지 거침없이 질문하고 답한다. 그리고 그 사유가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읽힌다. 전공분야가 아닌 다른 전공의 최신 지식에 대해 끊임없이 배우고 그에 대해 글을 써 출판하는 저자의 능력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 모두가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는 저자의 굳은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니, 보통사람인 나도 도전할 수 있을거라 희망을 가져본다.